
가끔 이런 순간이 있죠.
일기장에 뭐라도 적어보려고 펜을 들었는데, 손이 멈춥니다. 마음속으로는 간절히 빌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런 생각이 스윽 올라와요.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입으로는 “제발 잘 되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면서도, 속에서는 “그래 봤자 달라지겠어?”라는 의심이 같이 따라붙을 때. 믿고 싶지만 잘 믿어지지 않고, 버티고 싶지만 “이게 사는 건가” 싶은 날들. 특히 중년으로 갈수록 이런 충돌이 더 잦아집니다. 머리는 현실을 계산하고, 마음은 여전히 기대하고 소망하니까요. 그 모순 때문에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탓합니다. “내가 너무 비관적인가?”, “내가 이상한가?”라고요.
하지만 오늘은 그 자책을 잠깐 내려놓고 싶습니다.
당신의 그 의심과 허무는, 어쩌면 ‘마음이 약해진 증거’가 아니라 아직도 뭔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으니까요.
오늘은 세 명의 사상가를 만나볼게요.
이탈리아 시인 자코모 레오파르디, 스페인 철학자 미겔 데 우나무노, 러시아 사상가 레프 셰스토프.
공통점은 단순합니다. 이들은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어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아름다움과 믿음과 희망을 끝까지 놓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1) 레오파르디: “세상이 이 모양이어도, 아름다움은 포기하지 않겠다”
레오파르디는 세계를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인생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뼛속까지 아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그가 끝까지 놓지 않은 게 하나 있어요. 아름다움입니다.
하루 종일 지치고, 세상이 야속해서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싶다가도, 문득 창밖 노을이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레오파르디적인 순간이에요. 세상이 다 좋아서가 아니라, 세상이 엉망이어도 내가 아름다움에 반응한다는 사실이 나를 사람답게 붙잡아줍니다.
혹시 요즘 당신도 그런가요?
“다 소용없다”라고 말하면서도, 음악 한 곡에 마음이 흔들리고, 계절이 바뀌는 공기에 잠깐 숨이 트이고, 누군가의 따뜻한 말에 괜히 울컥할 때. 그건 당신이 무너진 게 아니라, 아직 감각이 살아있다는 신호예요.
2) 우나무노: “의심이 없는 믿음은 이미 죽어 있다”
우나무노는 인간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머리(이성)는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라고 냉정하게 말하고, 가슴(마음)은 “그래도 영원히 살고 싶다”라고 울부짖는다. 그 둘의 충돌이 인간의 ‘비극적 감정’이라고요.
그래서 우나무노에게 믿음은 ‘의심이 사라진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의심과 함께 존재하는 믿음이에요. 새벽에 간절히 기도하고 돌아와서도, 현실을 펼쳐놓고 “진짜 괜찮아질까?” 의심하는 마음.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내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래”라고 자책하지만, 우나무노는 이렇게 말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의심이 있어도 괜찮다.
그 의심을 안고도 한 걸음 나아가려는 마음이 살아 있는 믿음이다.”
삶이 팍팍할수록 의심은 자연스럽습니다. 중요한 건 의심을 없애는 게 아니라, 의심이 생겨도 내가 나를 버리지 않는 것이에요.
3) 셰스토프: “이성이 끝났다고 말해도, ‘혹시’라고 말할 자유는 남아 있다”
셰스토프는 이성이 모든 고통을 설명해주거나 해결해주지 못한다고 봤습니다. 이성은 종종 단호하죠. “이미 벌어진 일은 바뀌지 않아”, “확률적으로 기대하지 마.” 그런데 사람이 정말 힘든 순간에는, 입술이 다른 말을 합니다.
“제발… 한 번만…”
병원 복도에서, 결과를 기다리는 날에, 관계가 흔들릴 때, 인생이 막힌 것 같을 때. 이성은 포기하라고 말하지만 마음은 ‘혹시’를 붙듭니다. 셰스토프는 그 ‘말도 안 되는 희망’을 인간이 마지막까지 놓지 않는 자유로 봤어요. 합리적인 계산이 전부라면 우리는 너무 빨리 무너질 테니까요.
중년의 머리가 “이젠 큰 변화는 없어”라고 결론내릴 때도, 마음 한구석에서 “그래도 아직 모른다”라고 말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를 무시하지 마세요. 그건 미련이 아니라 살고자 하는 의지의 다른 이름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어요.
우리가 “다 소용없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은 단순한 체념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 안에는 이런 마음이 숨어있어요.
- 더 잘되고 싶었고
- 더 사랑받고 싶었고
- 내 인생이 조금은 더 아름다웠으면 좋겠고
- 내 노력이 헛되지 않길 바랐던 마음
즉, 비관은 종종 상처 난 기대의 다른 얼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비관을 없애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그 비관 뒤에 숨은 “내가 진짜 원했던 것”을 조용히 알아차려주는 거예요. 이걸 알아차리는 순간, 마음은 이상하게 조금 정리됩니다. “내가 냉소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기대가 있었구나” 하고요.
아래 세 문장 중 가장 마음에 닿는 한 줄만 골라서, 잠들기 전 조용히 중얼거려보세요.
- (레오파르디) “세상이 이 모양이어도, 나는 오늘 하늘 한 번은 올려다보겠다.”
- (우나무노) “나는 오늘도 의심하지만, 그 의심을 안고서라도 믿고 싶다.”
- (셰스토프) “이성이 끝났다고 말해도, ‘아직 모른다’고 말할 자유는 내게 남아 있다.”
이건 긍정 주문이 아닙니다. 억지로 밝아지라는 말도 아니에요.
그저 과한 세상 속에서, 내 마음을 너무 몰아붙이지 않기 위한 작은 손잡이입니다.
비관적인 생각이 많아졌다고 해서, 당신이 차가워진 게 아닙니다.
“무슨 소용이냐”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누군가를 걱정하고, 더 나은 내일을 바라고, 작은 아름다움에 흔들리는 사람이라면, 그건 결론적으로 한 가지를 뜻합니다.
당신은 생각보다 훨씬 깊이, 세상과 사람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
오늘 하루도 여기까지 버텨온 당신에게 진심으로 말해주고 싶어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혹시’라는 작은 희망을 놓지 않은 당신은,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내일도, 너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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